아가페 사랑 누가 실천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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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12-11 10:26 조회1,457회 댓글0건본문
아가페 사랑 누가 실천하는가?
아가페 사랑을 완전하게 실천하는 사람은
불완전한 인간들 중에 아직 없지만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그 사랑의 완성자를 본받기 위하여 발자취를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성서는 사랑(love)의 정의를
그리스어, 아가페, 필리아, 스토르게, 에로스
네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가페에는 원칙의 인도 혹은 지배를 받는
사랑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애정과 좋아하는 마음이 포함될 수도 있고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가페에 애정이나 따뜻함이 포함된다는 면이
요한 3 : 35 에 보면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아가파]하신다
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애정이 담겨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이 불러 일으키는 행동을 통하여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자기만족의 사랑이나 애정이 아닙니다.
아가페는 어떤 뛰어난 점이 있어서 생겨난 사랑이 아닙니다.
아가페가 원칙을 존중한다는 면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이 없다면 냉정한 공의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정이나 기분에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원칙을 무시하는 일이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애정이나 좋아하는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아가페를 올바로 나타내는데,
그 사람들의 복지를 위하여 그렇게 합니다 (갈 6:10)
그들은 그런 다른 사람들에 대해, 애정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의로운 원칙이 허용하고 인도하는 범위까지
그것이 허용하고 인도하는 방식으로 진심에서
동정심을 느끼고 진지하게 염려합니다.
그러나 아가페가 원칙의 지배를 받는 사랑을 가리키기는 하지만,
원칙도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나쁜 것도 있습니다.
나쁜 원칙에 인도되어 그릇된 아가페를
표현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아가파테]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무슨 영예가 되겠습니까?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합니다.
또 여러분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여러분이 선을 행한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과연 무슨 영예가 되겠습니까? 죄인들도 그와 같이 합니다.
또한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이자 없이 빌려 준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무슨 영예가 되겠습니까?
죄인들도 그대로 되돌려 받기 위하여 죄인들에게
이자 없이 빌려 줍니다.” (누가 6 : 32-34)
그러한 사람들의 행동의 기초가 되는 원칙은 ‘
내게 선을 행하라, 그러면 나도 네게 선을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들을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이 세우신 원칙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가운데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요한 1 서 4 : 8)
여호와 하느님은 바로 아가페 사랑의 구현체이신데,
사랑은 여호와의 지배적인 특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구현체 이시기 때문에 악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악을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에는 따뜻한 개인적 애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포함되는데,
이것은 인격체만이 가질 수 있고, 나타낼 수 있는 특성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랑이시라는 증거는 풍부합니다.
바로 물질적인 창조물에서도 그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경탄할 만한 배려로, 인간의 건강과 즐거움과
복지를 위해 알맞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하게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을 즐기고 피조물의 다채로운 색상과 아름다움을
보고 즐거워하며, 또 동물들을 보고 이웃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즐거워하며 그 밖에 셀 수 없이 많은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시편 139 : 14, 17, 18)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사랑과 영성에
필요한 역량을 지니도록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습니다(창세기 1 : 26, 27),
그리고 자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사랑을 한층 더 나타내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2 : 12, 13.
인류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은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마태 5 : 45)
그분은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아무것도, 그분에게 아무리 값비싼 대가가
요구되는 것이라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느끼거나 표현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능가합니다.
(에베소 2 : 4 - 7; 이사야 55 : 8; 로마 11 : 33)
그분은 인류를 위해서 최대의 사랑을 나타내시어
부모로서 해 줄 수 있는 가장 사랑에 넘친 일을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충실한 독생자의 생명을 주신 일이었습니다.
(요한 3 : 16)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
이라고 기술하였습니다. (요한 1서 4 : 19)
따라서 그분은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요한의 동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해서 감히 죽는 사람은 혹시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추천하십니다.”
여호와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종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든지, 그들에게 어떤 크거나
작은 일들이 닥치든지 없어지거나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부들이나 지금 여기 있는 것이나 올 것이나 권세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 8 : 38, 39
예수 그리스도 께서는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랑의 근원이신 아버지와 지극히 친밀하게 교제하셨고
그분을 지극히 친숙하고 철저하게 아셨기 때문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도 본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요한 14 : 9; 마태 11 : 27)
그러므로 예수의 사랑은 온전하고 완전합니다.
(에베소 3 : 19)
그분은 제자들에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영혼을 내주는 것,
이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5 : 13)
그분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곧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힌 13 : 34)
이 계명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
왜냐하면 당시에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이 지켜야 했던
율법에서는 사람에게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9 : 18; 마태 22 : 39)
율법은 자신처럼 남도 사랑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남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줄 정도까지 자기희생적으로
사랑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의 생애와 죽음은 이 새 계명이 요구하는 사랑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면
기회가 생길 때 선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도 아래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나
다른 면으로 도와주려고 솔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생명)을
내줄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요한 1서 3 : 16.
첫 인간 남녀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이 지배적인 속성
곧 사랑을 상당히 지니도록 창조되었고,
그 사랑을 넓히고 확대하고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역량도 부여받았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영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 5 : 22)
경건한 사랑은 신체적인 아름다움이나 음악적 재능
혹은 그와 유사하게 유전받은 특성들 같은 특정한
신체 능력이나 정신 능력처럼, 어쩌다가 갖게 된
것인지 모르는 채 갖게 되는 그런 특성이 아닙니다.
경건한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나 봉사 없이는
혹은 묵상이나 인식 없이는 사람이 갖게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배양해야만 비로소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시편 77 : 11; 에베소 5 : 1, 2; 로마 12 : 2)
인류가 일반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그 사랑은 흔히 그릇 인도되고 변질되고 왜곡된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올바른 방향의 진정한 사랑을 갖는 것은
하느님의 영을,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서 나오는 지식을
추구하고 따를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경건한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좋고
유익한 것을 행하게 해 줍니다. ‘사랑은 세워 줍니다.’
(고린도 전서 8 : 1)
그러나 사랑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며, 굳건하고 강합니다
경건한 지혜의 인도를 받으며, 순결하고 올바른 것에 고착합니다.
하느님의 영의 열매인 참 사랑은 광범위한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6 : 11 - 13)
사랑은 인색하거나 틀에 박힌 것이거나 제한적이 아닙니다
사랑은 함께 나누어야만 완전해집니다
1) 사람은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신명기 6 : 5)
2) 그분의 아들을 사랑하고(에베소 6 : 24)
3) 그리스도인 형제들 전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2 : 17).
4)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해야 합니다
(에베소 5 : 25, 28, 33)
5) 사랑은 자녀들에게도 베풀어져야 합니다
(디도서 2 : 4)
6) 전 인류 심지어 자신의 적까지도 사랑해야 하며,
그리스도인 활동은 그들에 대해서도 행해져야 합니다
(마테 5 : 44; 누가 6 : 32 - 36)
성서에서는 사랑을 언급하면서
“이런 것들을 반대할 법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 5 : 22, 23)
이 사랑을 제한할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을 받기에 마땅한 사람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어느 정도로든 나타내 줄 수 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서로에게 빚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입니다
(로마 13 : 8)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질투하지 않고, 뽐내지 않고,
우쭐대지 않고,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해를 입은 것을 유념해 두지 않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인내합니다.”
고린도 첫째 13 : 4 - 7.
아가페 사랑을 완전하게 실천하는 사람은
불완전한 인간들 중에 아직 없지만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그 사랑의 완성자를 본받기 위하여 발자취를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성서는 사랑(love)의 정의를
그리스어, 아가페, 필리아, 스토르게, 에로스
네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가페에는 원칙의 인도 혹은 지배를 받는
사랑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애정과 좋아하는 마음이 포함될 수도 있고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가페에 애정이나 따뜻함이 포함된다는 면이
요한 3 : 35 에 보면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아가파]하신다
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애정이 담겨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이 불러 일으키는 행동을 통하여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자기만족의 사랑이나 애정이 아닙니다.
아가페는 어떤 뛰어난 점이 있어서 생겨난 사랑이 아닙니다.
아가페가 원칙을 존중한다는 면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이 없다면 냉정한 공의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정이나 기분에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원칙을 무시하는 일이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애정이나 좋아하는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아가페를 올바로 나타내는데,
그 사람들의 복지를 위하여 그렇게 합니다 (갈 6:10)
그들은 그런 다른 사람들에 대해, 애정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의로운 원칙이 허용하고 인도하는 범위까지
그것이 허용하고 인도하는 방식으로 진심에서
동정심을 느끼고 진지하게 염려합니다.
그러나 아가페가 원칙의 지배를 받는 사랑을 가리키기는 하지만,
원칙도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나쁜 것도 있습니다.
나쁜 원칙에 인도되어 그릇된 아가페를
표현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아가파테]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무슨 영예가 되겠습니까?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합니다.
또 여러분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여러분이 선을 행한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과연 무슨 영예가 되겠습니까? 죄인들도 그와 같이 합니다.
또한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이자 없이 빌려 준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무슨 영예가 되겠습니까?
죄인들도 그대로 되돌려 받기 위하여 죄인들에게
이자 없이 빌려 줍니다.” (누가 6 : 32-34)
그러한 사람들의 행동의 기초가 되는 원칙은 ‘
내게 선을 행하라, 그러면 나도 네게 선을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들을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이 세우신 원칙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가운데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요한 1 서 4 : 8)
여호와 하느님은 바로 아가페 사랑의 구현체이신데,
사랑은 여호와의 지배적인 특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구현체 이시기 때문에 악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악을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에는 따뜻한 개인적 애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포함되는데,
이것은 인격체만이 가질 수 있고, 나타낼 수 있는 특성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랑이시라는 증거는 풍부합니다.
바로 물질적인 창조물에서도 그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경탄할 만한 배려로, 인간의 건강과 즐거움과
복지를 위해 알맞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하게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을 즐기고 피조물의 다채로운 색상과 아름다움을
보고 즐거워하며, 또 동물들을 보고 이웃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즐거워하며 그 밖에 셀 수 없이 많은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시편 139 : 14, 17, 18)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사랑과 영성에
필요한 역량을 지니도록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습니다(창세기 1 : 26, 27),
그리고 자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사랑을 한층 더 나타내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2 : 12, 13.
인류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은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마태 5 : 45)
그분은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아무것도, 그분에게 아무리 값비싼 대가가
요구되는 것이라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느끼거나 표현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능가합니다.
(에베소 2 : 4 - 7; 이사야 55 : 8; 로마 11 : 33)
그분은 인류를 위해서 최대의 사랑을 나타내시어
부모로서 해 줄 수 있는 가장 사랑에 넘친 일을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충실한 독생자의 생명을 주신 일이었습니다.
(요한 3 : 16)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
이라고 기술하였습니다. (요한 1서 4 : 19)
따라서 그분은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요한의 동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해서 감히 죽는 사람은 혹시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추천하십니다.”
여호와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종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든지, 그들에게 어떤 크거나
작은 일들이 닥치든지 없어지거나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부들이나 지금 여기 있는 것이나 올 것이나 권세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 8 : 38, 39
예수 그리스도 께서는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랑의 근원이신 아버지와 지극히 친밀하게 교제하셨고
그분을 지극히 친숙하고 철저하게 아셨기 때문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도 본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요한 14 : 9; 마태 11 : 27)
그러므로 예수의 사랑은 온전하고 완전합니다.
(에베소 3 : 19)
그분은 제자들에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영혼을 내주는 것,
이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5 : 13)
그분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곧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힌 13 : 34)
이 계명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
왜냐하면 당시에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이 지켜야 했던
율법에서는 사람에게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9 : 18; 마태 22 : 39)
율법은 자신처럼 남도 사랑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남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줄 정도까지 자기희생적으로
사랑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의 생애와 죽음은 이 새 계명이 요구하는 사랑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면
기회가 생길 때 선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도 아래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나
다른 면으로 도와주려고 솔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생명)을
내줄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요한 1서 3 : 16.
첫 인간 남녀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이 지배적인 속성
곧 사랑을 상당히 지니도록 창조되었고,
그 사랑을 넓히고 확대하고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역량도 부여받았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영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 5 : 22)
경건한 사랑은 신체적인 아름다움이나 음악적 재능
혹은 그와 유사하게 유전받은 특성들 같은 특정한
신체 능력이나 정신 능력처럼, 어쩌다가 갖게 된
것인지 모르는 채 갖게 되는 그런 특성이 아닙니다.
경건한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나 봉사 없이는
혹은 묵상이나 인식 없이는 사람이 갖게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배양해야만 비로소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시편 77 : 11; 에베소 5 : 1, 2; 로마 12 : 2)
인류가 일반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그 사랑은 흔히 그릇 인도되고 변질되고 왜곡된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올바른 방향의 진정한 사랑을 갖는 것은
하느님의 영을,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서 나오는 지식을
추구하고 따를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경건한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좋고
유익한 것을 행하게 해 줍니다. ‘사랑은 세워 줍니다.’
(고린도 전서 8 : 1)
그러나 사랑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며, 굳건하고 강합니다
경건한 지혜의 인도를 받으며, 순결하고 올바른 것에 고착합니다.
하느님의 영의 열매인 참 사랑은 광범위한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6 : 11 - 13)
사랑은 인색하거나 틀에 박힌 것이거나 제한적이 아닙니다
사랑은 함께 나누어야만 완전해집니다
1) 사람은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신명기 6 : 5)
2) 그분의 아들을 사랑하고(에베소 6 : 24)
3) 그리스도인 형제들 전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2 : 17).
4)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해야 합니다
(에베소 5 : 25, 28, 33)
5) 사랑은 자녀들에게도 베풀어져야 합니다
(디도서 2 : 4)
6) 전 인류 심지어 자신의 적까지도 사랑해야 하며,
그리스도인 활동은 그들에 대해서도 행해져야 합니다
(마테 5 : 44; 누가 6 : 32 - 36)
성서에서는 사랑을 언급하면서
“이런 것들을 반대할 법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 5 : 22, 23)
이 사랑을 제한할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을 받기에 마땅한 사람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어느 정도로든 나타내 줄 수 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서로에게 빚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입니다
(로마 13 : 8)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질투하지 않고, 뽐내지 않고,
우쭐대지 않고,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해를 입은 것을 유념해 두지 않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인내합니다.”
고린도 첫째 13 : 4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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